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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서재

180807 타자감_ 낮의 목욕탕과 술/ 구스미 마사유키 (1)

 

아홉번 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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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어도, 아사쿠사

 

아사쿠사, 자코츠 탕

아사쿠사에 가려고 했더니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이걸 어째, 역시 오늘은 그만둘까. 그렇지만 문득 비 내리는 아사쿠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후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아사쿠사는 까닭 없이 좋아하는 거리이기도 해서 목욕을 겸해 종종 가곤 한다. '아사쿠사칸논온센'으로 갈까 '자코츠탕'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비도 오고, 역에서 가깝기도 해서 자코츠탕으로 정했다.

신도시 철도인 츠쿠바 익스프레스는 처음 타본다. 소부 선을 타고 아키하바라에서 환승해서 두 번째 역. 가깝다.

그런데 가보니까 새로 생긴 지하철이 그러하듯 홈이 아주 깊다. 오에도 선과 마찬가지. 에스컬레이터가 땅속으로 끝도 없이 내려간다. 시간이 걸린다. 사람을 많이 걷게 한다. 도중에 갑자기 귀찮아졌다.

평소에는 소부 선 아사쿠사바시에서 도영지하철 아사쿠사선을 타거나, 주오 선 간다에서 지하철 긴자 선으로 갈아타곤 한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은 대체로 한잔 걸친 터라 아사쿠사에서 출발하는 긴자 선을 타고 종점인 시부야까지 숙면을 청하며 한번에 가는 경우가 많다. 취객에게는 편리한 코스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그렇다. 어른이 되어 아사쿠사에서 맨정신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꼭 다른 곳에 들러 한층 더 취하고는 전철에서 그냥 쿨쿨 자버리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장대비다.

집안에 있을 때면 의외로 아니, 은근히 즐겁다.

바깥은 비가 좍좍 쏟아지는데,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묘한 안도감마저 어깨를 감싼다. 몇 살이 되어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 모르게 퍼질러 누워서 '약 오르지'하고 속으로 까분다.

누구를 향해? 그건 나도 모르지.

학생일 때는 아침에 비가 내리면 "으악!" 비명을 질렀더랬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회사에 다니던 시절, 아침에 비나 눈이 내리면 얼굴을 찌푸리며 "으악 !"비명을 질렀다.

아, 그런가. 나는 회사원 경험이 없으니까. 학교를 졸업하고나서도 매일같이 아침부터 일어나 출근하는 사람들을 향해 '약 오르지'하는 심술궂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한낮에 좋아하는 사람과 침대에 있는 것도 정말 달콤하다.

어디로도 나갈 수 없다. 어디에도 나가지 않는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창밖이 어둡고 이따금 천둥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빗소리가 방을 짓누른다.

그렇지만 침대 안은 절대적인 안전지대. 완벽한 이곳에는 조금의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의 체취 속에 잠겨들수록 둘은 더 가까워진다.

어디든 손이 닿을 수 있다.

사랑을 나누어도 좋고 잠시 졸아도 좋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따분할 틈이 없다.

침묵 속에서도 느긋하게 교감한다.

그 혹은 그녀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다.

어느새 잠들어버리면 곁에 앉아 책을 읽어도 좋다.

그 모습은 둥지 속 작은 새 같기도 바닷속 부드러운 해초 같기도 하다. 서로 엉킨 채 때때로 몸을 흔들어 형태를 바꾼다.

어느덧 방은 어두워졌다.

아직 비가 내리는데 밤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불을 밝히면 갑자기 이 엷은 복숭아색의 어둠이 사라지고 누군가가 만든 일상이 허옇게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아

좀처럼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아, 배가 고파지고 만다.

어른이다. 젊은 남녀만의 시간이다.

이런 연애 풍경은 어린아이도 노인도 아저씨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몇 년 만의 자코츠 탕인가.

쇼핑몰 아사쿠사 록스 근처의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선 곳에 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 취재로 왔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의 '자전거 여행'시리즈.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던 까닭에, 정말이지 감격의 홍수였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자코츠탕의 1910년대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목욕탕으로 보이지 않는 아주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이었다.

사진을 보여주던 자코츠탕 안주인의 화통하고 친절한 응대 또한 잊을 수 없다. '아, 이게 아사쿠사인가*'(도쿄를 처음 찾는 사람은 꼭 들른다는 지역이다. 외국인뿐만아니라 자국인도 마찬가지다. '역사와 전통','오래된 손맛' 그리고 '호탕하면서도 친근한 서민의 정서'가 가득한 곳이다. 아, 좋다 !)

그런데 왜 사골(蛇骨,자코츠)인 걸까. 뱀의 뼈라니.

사연을 들었던 것 같긴 한데 생각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온 게 거의 십 년 전이니 말이다.

그때도 그랬듯이 신사지붕 양식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억하고는 다르다.

입장권을 자판기에서 사는 형식이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리뉴얼이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서니 입구 쪽을 향한 프런트에서 표를 받는다. 이어서 남탕은 왼쪽, 여탕은 오른쪽으로 갈린다. 이런 스타일은 지난번과 마찬가지지만, 이곳저곳 깨끗해졌다.

이제 티셔츠, 청바지, 팬티, 양말을 벗고 욕탕으로.

여름은 간단히 홀딱 벗을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은 코트니 머플러니 장갑이니 스웨터니, 벗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술집이나 식당에서도 마찬가지. 벗다가 지쳐버린다.

여름은 좋다. 몸이 가볍잖아. 그래서 여름을 좋아한다.

욕탕에 들어서니 정면의 거대한 후지산 벽화가 눈길을 끈다. 이건 지난번과 같다. 정기적으로 다시 그려 넣는 이른바 목욕탕 페인트화가 아니다.

보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렸다. 색감이 조잡한 페인트화와는 다르다. 영화사 쇼치쿠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너무도 당당하고 안정적인 후지산이다.

리얼한 소나무 가지가 후지산을 배경으로 빛난다. 참 좋다.

후지산 바로 앞은 호수인가. 살짝 불그스름한 하늘은 아침노을일까. 지평선의 빛이 구름에 반사된다.

만일 오랜 외국생활을 하다 귀국한 사람이라면 곧장 이 목욕탕으로 오는 게 좋겠다.

'아아, 일본에 돌아왔어' 하고 감격하지 않을까.

탕 속의 물은 보리차처럼 엷은 갈색이다.

맞아, 자코츠탕은 천연 광천수였어. 그렇지만 입장료는 일반 목욕탕값이다.

먼저 몸을 씻어볼까 하고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이 또한 갈색이다. 가져온 수건이 갈색으로 변한다.

일단 안쪽 탕에 들어갔다.

너무 뜨거워서 오래 앉아 있기 힘들다. 그렇지만 물은 정말 매끄럽다. 역시 천연 광천수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테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인터넷에서 자코츠탕을 검색해봤더니 홈페이지가 있다.

"흑탕은 화산성 온천수와는 달리 고생대에 묻힌 풀과 나뭇잎 성분이 지하수에 스며들어 조성된 냉광천수로서 가나가아현 요코스카, 가마쿠라 주변에서 도쿄 만 연안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몸속 깊은 곳까지 열기를 전달하고, 목욕 후에도 오래도록 몸의 열기를 보존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설명을 미리 읽고 가면 광천수를 향한 고마움이 한층 깊어질 것이다.

한편'고생대에 묻힌 풀과 나뭇잎 성분'이라는 부분이 왕년에 남자아이였던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영화<고질라>속 한 장면. 시무라 다카시가 연기한 생물학자 야마네 교헤이가 국회에서 고질라에 대해 이야기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시절까지 돌아가는 건가. 언제까지고 유치찬란한 나.

...(중략)...

비에 젖은 푸른 나뭇잎, 사소한 정취다.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탕에 몸을 담그는 것 또한 비 내리는 날 이불에 쏙 파묻힌 느낌과 마찬가지로 뭐라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즐겁다.

왔을 때 보다는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진 듯하다.

"기분 좋네."

혼자뿐이라 소리 내어 말해본다.

지금껏 찾은 곳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목욕일지도 모른다.

비 덕분이다. 오늘 오기를 잘했다. 아사쿠사까지 오기를 참 잘했다.

 

다시 실내로 들어가니, 손님 가운데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멋쟁이 남자가 있다.

옆을 지나치며 살펴보니 외국인이었다. 미국인은 아닌 것 같은데. 유럽인일 거야.

이름은 '쟝 알렉산더 슈발'(ㅅㅂ ㅋㅋㅋㅋㅋㅋㅋ)이 아닐까. 가까운 이들은 '알렉스'라 부르는.

뭐야, 또 남의 이름을 엉터리로 지어내고.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어쩐지 알렉스처럼 보여서 재미있다.

'존 킹스턴'은 절대로 아니다.'카를로스 다나카'도 아니다.

멋진 알렉스지만 목욕탕은 어색한 모양이다. 처음 온 건지도 모른다.

전기탕에 들어가려 하기에 '알렉스, 괜찮겠어?' 하고 생각했다. 아슬아슬한 순간, 그는 그 옆의 탕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답이야, 알렉스.

나는 전기탕이 정말 싫다. 왜 저런걸 만들어뒀지?

물속에 전기가 흐르면 감전되잖아.

내가 부르르 떠는 것이 그 증거. 할아버지들이 즐겨 들어가지만, 저런 데 들어가서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전기 찌릿찌릿,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싫다. '세상에서 가장 싦은 것 베스트 3'에 들어갈 정도.

정전기도 정말 싫어. 찌찌찍, 심장이 멈출 것 같다. 정전기 방지 장치, 겨울에는 반드시 지참한다. 역시 겨울보다는 여름이 좋다. 단연코 좋다.

자칫 위험할 뻔했던 알렉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전기탕에서 벗어났다. 쿨하다. 속으로는 발이 저릿하는 순간, '으앗!'하고 비명을 질렀을 텐데. 여자한테 인기 많을 거야. 쟝 알렉산더 슈발. 세계 어디를 가든.

그에 비해 내 옆으로 스윽 몸을 밀어 넣는 아저씨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섬세하지 못한 얼굴.

아마도 '도요토미 몬나니', 그런 느낌을 주는 이름일 것이다.

절대로 '츠지 하루키'는 아니다. '바쇼 루즈벨트'일 리도 없다.

눈썹이 짙고 수염도 더부룩하고 코털도 굵을 것 같다.

두터운 입술에 볼살은 아래로 처진 느낌. 눈은 크지만 툭 튀어나왔다.

가슴 털이 부숭부숭. 배꼽 털이 음모로 이어졌다.

체형, 이른바 가로로 퍼진 땅딸보.

몸집에 비해 작아. 털에 묻혀버릴 것 같아. 아니, 뭐가?

너무 심하다.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꼬락서니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미타카에 사는 돼지감자 대머리 아저씨랍니다.

쟝 알렉산더 슈발이 노천탕으로 향했다.

그런데 탈의실에서 슬쩍 살펴보았더니(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도요토미 몬나니와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

(두둥 ! 대반전 )

무어라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활짝 웃고 있다.

혹시 도요토미 몬나니는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대학교수이면서 베스트셀러를 몇 권이나 냈고, 아사쿠사의 고급빌라에 사는 유명인일지도 모른다.

이름도 '우에스기 히비키'같은, 어쩐지 위스키와 비슷한 끈적거리는 맛이 있는 이름일지도 모르고.

쟝 알렉산더 슈발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탓에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지금은 물수건 배달 알바를 하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윗사람한테 야단만 맞는 사내일지도 모른다. 이름도 놀라우리만치 맹숭맹숭한 '야마구치 다니엘'일지도 몰라.

 

 

/

 

 

오래 전, 아사쿠사에 다녀온 적이 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었다.

스미다가와 강에서 열리는 불꽃 축제가 보고 싶어서, 나의 첫 마츠리 였던 지라 야심차게 유타카도 사입고

블로그 검색으로 불꽃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까지 섭외해놨는데 ...

막상 가보니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구름에 가려 불꽃은 잘 보이지도 않고..

아... 탄식

이었던 기억이 있다.

하필 같이간 친구가 착해가지고, 그 친구는 다른 마츠리 가자고도 했었는데

비오고 불꽃은 하나도 안보이고 엉망진창인데도 짜증 한 마디 없이 같이 있어주었다 ( 착한 나기쨩.. ㅠㅠ)

그래도 같이 오손도손 가게 가서 맥주도 마시고, 가미나리몬 앞 죽 늘어서있는 마츠리 거리에서

당고도 사먹고 .. 가미나리몬 안 엄청 큰 기둥 옆에 앉아 사이좋게 수다도 떨고

그때 기둥 옆 수도관? 호스로 빗물이 콸콸콸콸 ! 쏟아지던게 아직두 기억난다

비 피해서 천장 있는 곳에 걸터 앉아있었는데도 등이랑 유타카 밑단이랑 다 젖고 ㅋㅋㅋㅋ

나름 이제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사실 처음 도쿄로 여행갔을 때도 시간이 없어서 못 가보고

지난 해에도 저게 유일한 아사쿠사 방문이었던지라

나름 은연중에 아사쿠사와의 재회할 기회를 점쳐두고 있었는데

 

이 글을 빌미 삼아 한 번 더 다녀오게 될 듯하다

역시 구스미 마사유키 .. 사스가 당신 !

어른의 혼자라이프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결이 너무 비슷하다

당신은 도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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